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코모 카사노바 (문단 편집) === 떠돌이 인생 === 성직자로 살 수 없게 된 카사노바는 20세에 군대에 입대하여 [[오스만 제국]]으로 건너갔다가 [[이탈리아 반도]]로 돌아왔다. 화려한 언변과 재능으로 여자들을 유혹했는데, 22세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귀족]]이자 상원의원이었던 마테오 조반니 브라가딘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1747년 4월 어느 귀족의 결혼식에 가던 중, 함께 [[곤돌라]]를 탄 마테오 조반니 브라가딘이 갑자기 쓰러지자 응급처치로 살려냈다. 이 답례로 주치의로 일하게 되었다가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자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카사노바가 자신은 점을 쳐서 미래를 볼 수 있으며 이런 날이 올 것도 미리 알았다고 주장하자 이를 믿고 양자로 입적,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아들로서 하인과 곤돌라, 매달 10제키니의 용돈을 받게 되었다 ] 더 거칠 것이 없어졌다. 가문빨 및 돈빨로 카사노바는 각 지역을 돌아다녔다. 27세에서 29세까지는 파리에 거주했으며 여행 중에 만난 모든 여자들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였다. 카사노바 자신의 회고록에 의하면 122명의 여자들을 안았다고 한다. 그는 나이 30세에 베네치아에서 [[난교]] 파티를 열었는데 이때 [[수녀]]까지 끌여들였다가 카사노바를 탐탁치 않게 여긴 귀족층에서 그를 "이성을 유혹하는 이단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라는 죄목으로 체포했고 5년형을 선고받고 1년간 두칼레 궁전에 있는 피옴비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이때 일을 회고하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타인에게 잘못한 적이 없다. 사회 안정을 위협한 적도 없고 남의 일에 간섭한 일도 없다. 사적인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단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종교재판관의 애인과 자주 만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피옴비 감옥에 갇힌 그는 [[탈옥]]을 결심, 탈출구를 만들어 1756년 수감 1년 5개월만에 탈옥에 성공했다. 탈옥한 그는 1757년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옛 친구의 도움으로 재정 전문가로 활약하며 [[루이 15세]]에게 [[복권]] 사업 도입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1758년부터 복권 사업소 5곳을 운영하며 막대한 수입을 벌여들였고 재정적으로 넉넉해지자 또다시 여자들을 자신의 침실로 불러들였다. 그러던 중 실크 프린팅 사업에 실패하고 여자들과의 관계로 돈을 탕진하기에 이르자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렸고 이를 갚지 못 할 상황이 닥쳐 또다시 도망가기에 이른다. 이때부터 그는 "생갈의 기사"라는 가명을 썼다.[* 문서 첫머리에 소개된 이름 Giacomo Girolamo Casanova de Seingalt가 바로 이 가명을 포함한 이름이다. '생갈의 자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 Seingalt가 생갈로 읽히는 이유는 이 당시 [[유럽]]의 교양인들 사이에서 공용어처럼 사용되던 [[프랑스어]]로 읽었기 때문. 그런데 de Seingalt는 귀족의 성이고, 생갈에 영지를 가진 혹은 그러한 선조가 있는 [[귀족]]이 아닌 그냥 베네치아 시민 계급 출신이던 자코모 카사노바가 자기 이름에 멋대로 귀족의 성을 붙인 것은 단순한 가명이라기보다는 신분 사칭에 가깝다.] 1763년 [[영국]]을 방문한 그는 [[프랑스 왕국|프랑스]]에서와 달리 푸대접을 받았고, 한 [[매춘부]]에게 사기를 당해 빈털털이가 되어버리기까지 했다. 이후 그는 [[베를린]]으로 가서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만나기도 했고, [[러시아 제국|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를 만나기도 했다. 러시아에 머물면서도 여자들을 건드리다 뿔난 러시아 남자들이 [[러시아식 유머|"러시아에선 남자가 카사노바를 죽입니다!"]]라는 반응을 보여 카사노바는 [[폴란드-리투아니아|폴란드]]와 [[스페인]]을 전전하게 된다. 그러다 고향인 이탈리아로 돌아가고 싶어했고, 그가 스페인에서 쓴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어 베네치아의 고위인사들의 눈에 들면서 결국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49세부터 나폴리에서 도박사로 일하면서 베네치아의 밀정으로 일한 적이 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요구가 점점 많아지자 도박사와 밀정을 그만두었다. 50대가 되어 출판업으로 먹고 살던 그는 1783년에 《사랑도 싫고, 여자도 싫다》라는 책에서 자신의 친아버지가 미켈레 그리마니이며 그리마니의 아들 카를로 그리마니는 세바스티안 지우스타니의 사생아라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켰다. 카를로 그리마니는 분노했고 베네치아의 여론이 악화되자 카사노바는 또다시 줄행랑을 치기에 이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